﹝ Meene Lanfei  ‧  미이네 란페이﹞

지금까지 5년간, 《미이네 도로 란페이》 는⋯⋯..

• 홋카이도, 아와유키 마을에서 약 한 달 가량을 머물다가 대중교통으로 4시간 거리의 이와미자와 시로 떠났다. 불안을 이기지 못한 결과였다. 그곳의 사찰인 만염사에서 은사 스님의 밑으로 들어가 체달을 꾀한 것이다.

• 그렇게 5년의 세월 동안 모든 접점이 끊겼다. 최소한 3년은 존재가 부재했다. 이후 혹여 마주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태도며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조금만 파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성질이 조금 고약해진 것 이상으로 이따금, 상대와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했다. 열에 다섯은 잊어버렸다. 미안하다. 답할 따름이다.

•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불려도 한 번에 반응하지 못한다. 미이네 도로 란페이보다 스승에게 받은 법명인 겐쿠源空로 불리는 일이 더욱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를 승려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애시당초 그럴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유는 즉슨⋯

• 홀로 수행을 마치고 정식 승려가 된지 딱 3개월이 지나던 해, 그러니까 방울이 울리는 4주 전을 기점으로 어이없게도 파문을 당했다. 어떻게 구족계를 받아내었는지도 의문일 정도로 십계를 지키지 아니하여 수순대로 쫓겨났다.

• 아와유키 마을로는 2주 전, 방울이 울린 당일에 도착했다. 이전까지는 하염없이 떠돌았는데, 또 어디서 구르다 온 건지 꾀죄죄한 몰골에 술 내음이 진동했다. 그라운드 위의 란페이에게는 일상이었다.

01. 개인정보

• 한낮의 여름. 7월 13일생의 미이네 란페이. 어지러울 란(亂)과 평평할 평(平)자를 써 혼란의 중심에도 단단히 서라는 뜻으로, 기둥을 의미한다. 이처럼 도로 파는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지반을 연관 짓는다. 가문의 모토를 새기고 요괴에게 지지 않기 위함이다.

• 그리고 법명인 겐쿠. 근원 원(源)과 빌 공(空)자를 써 진리를 의미하나 기실 란페이는 본 뜻을 허무로 해석했다. 고향 땅을 잃고 가족을 잃어 텅 빈 마음을 술과 연초로 태우게 된 것도 햇수로 3년째다.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은 당연했다. 끝없는 고뇌는 쾌락에 젖으면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도.

02. 그라운드

20xx년의 봄, 아와유키 마을.

“그러니 괜찮아. 내가 너를 기억할게.”

• 아와유키를 떠나기 전, 아이들의 손을 맞잡은 그의 손은 단단하고 곧은 절개를 보였다. 한 달의 시간이 흐름에도 방울이 힘을 되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아 그라운드를 알아갈 결심을 세운 것이다. 그렇게 가까운 이와미자와 시로 떠나 두 달을 공부했다. 두 세계 사이의 연결점을 찾고자 매진하였다.

• 허나 그라운드의 역사와 지식들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하려는 노력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미지였으며 많은 것이 처음이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보람과 흥미를 느끼겠으나 그의 경우 정반대의 감상을 지닌다. 두려움과 후회. 스스로의 무력함. 고향을 향한 죄책과 그리움은 서서히 증폭되었다. 이에 만염사란 사찰을 방문해 은사 스님의 밑에서 교리를 받기로 결정한 것도, 의외는 아니다. 지하를 향할 수 없는 지금 번뇌를 끊고 얽매임에서 벗어나기에 출가보다 좋은 길은 없었다. 다소 절박한 결정이었다.

•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선택은 과정에서 나름의 도움을 주었다. 사찰의 잡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배움은 넘쳐났기에 그런 낮 동안은 잡념을 지울 수 있었다. 반대로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마음에 번민이 들어찼다. 돌이켜보면 그라운드에서 지내는 모든 삶이 고통이었다. 삼악도에 떨어져도 이토록 괴롭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 고로 입문례에서 공(空) 자의 법명을 받았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이를 통해 네 안의 중도를 찾을지어다. 그리고 그즈음 술에 절은 란페이는 생각했다. 망할, 그게 다 뭔 헛소리야.

03. 상실

20xx년의 겨울, 거리의 선술집.

“미안하지만, 전혀 기억나질 않는군.”

• 대면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문들이 있다. 승려이면서 유흥을 탐하는 작자라던가, 법구 대신 술병을 쥘 땡중 소리가 들려온다면 십중팔구 대상은 란페이였다. 이 호칭들은 그가 유흥가를 전전한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음을 방증했다. 숨겨서 무엇하리. 불도에도 불구하고 망가지던 정신은 유혹에 취약해졌고, 결과는 두말할 것도 없다.

• 사찰의 출가자 모두가 그를 내치고자 하였으나 그의 은사인 주승만이 지지하여 기어코 구족계를 받아냈다. 아니, 억지로 떠맡겨진 것에 가까웠다. 실상 그는 승려가 될 마음이 애진작에 떨어지고 없었다. 어째서 이런 자신을 믿느냐 물으면 너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심장한 답밖에 돌아오질 않았다. 하여튼 불경에서도 그러더니 죄 알아먹을 수 없는 말뿐이었다. 의미를 알고 싶어도 이제는 그것을 알려줄 이가 타계하여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 그는 사찰에서 파문당했다. 승려가 된지 딱 3개월이 되던 때였다. 미련은 없다. 유일한 의구심만이 발목을 잡았지만, 이 또한 언젠가 잊힐 기억이다.

• 운명의 장난인지 파계승이 된 지 2주 뒤에 방울이 울렸다. 그날도 고주망태가 되어 길바닥에 나앉아있었는데, 향수를 일으키는 진동에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서 곧장 아와유키 마을로 향했다. 헤매이지 않고 일직선으로 도착한 그곳에서 희미하지만 익숙한 낯들을 마주한 란페이는, 가장 처음으로, 미친 소리를 뱉었다. 너, 정확히 이름이 뭐였지?

• 그는 건망증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추억을 약 절반가량 잊었다. 바로 떠올리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긴 고심이 필요하거나, 아예 망각한 기억도 더러 있다. 모두를 기억하지만 가끔씩 틀린 이름으로 발음할 때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상대의 앞에서 기억하기를 애쓰지만 부러 거짓을 고하지도 않는다. 기억나는 건 곧이곧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 또한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냈다.

04. 후회

후회란 때늦은 반성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잊었다.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하나로 일축된다. 글씨는 다시 엉망이 되었고 줄곧 적어내렸던 편지와 다이어리는 기록이 끊긴지 오래다. 브로치와 오마모리, 꽃돼지 인형, 뾰족한 먼지 키링, 붉은색 귀걸이, 검은 리본 끈, 헤드셋, 지팡이, 바다 향, 도라지 꽃이 수놓아진 장갑, 벚꽃향의 향낭, 끈이 해진 게타도 전부 잃어버렸다. 다리가 꺾인 뒤로 체력도 예전 같지가 않다. 끝없던 식탐에 술독이 올라 제정신인 날을 찾기가 더욱 어렵다. 그 행적이 기어코 추억을 등한시하는 듯 굴었다.

분명 그럴 터인데, 여전히 타인에게 집착하는 꼴은 가히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마음이 불안할 때면 병나발부터 부는 이를 두고 어찌 진심이라 여길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5년 전의 과거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취기 오른 낯만 아니면 모든 게 예전처럼 똑 닮았다. 걱정도, 다정도, 우직한 일면까지. 이를 통한 교우관계는 상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허나 먼저 자신이 끊어내는 법은 없다. 떠나는 이 한번은 붙잡고 사과를 건네는 모습은 그가 타인을 향한 미련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단지 고향이 그리웠어. 번뇌를 안는 게 싫어서, 매일이 지옥도를 걷는 기분이라⋯.

05. 란페이

• 쓸데없이 세월을 낭비하지 말 것. 시간과 약속을 지킬 것. 먼저 남을 해하지 말 것. 무엇보다 삶에 집착할 것. 이제는 모두 의미 없는 철칙이다. 란페이는 이 모든 것을 어겼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도로는 건재하다. 양친이 요괴의 습격을 받고 맏이인 누님이 홀로 남은 현재에도 사당에서는 향이 피어오른다.

• 그런 가족의 생사 여부는 아직까지 불명이다. 가족의 얼굴도 차츰 희끄무레해지지만, 애정하는 감정만은 뚜렷하게 잔재한다. 그렇게 많은 것을 잊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잊지 아니한 것들이 있었다. 타인을 향한 애정, 그 진실한 위로와 유약함, 그리움. 차후 고향 땅을 밟을 적이면 더없는 평온을 가질 것이었다.

• 이에 그라운드에서와 달리 언더그라운드에서의 그는 나아감에 망설임이 없다. 자신의 자리를 알고 척척, 과거를 모방하듯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비록 주정꾼의 모습일지라도. 이것이 신실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절개일지, 아니면 단순히 족적을 그리는 행위일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 적어도 현재 그는 자신이 맑은 정신을 지녔다 말한다. 눈앞의 추억도 분간 못하면서 무슨 득도한 중마냥 말하고 있어? 웃기지 마! 일갈을 받으면 못마땅하게 입 비죽이는 낯이 18살 때를 기억나게 했다. 그때마다 꼭 부정했다. 내가 잊은 건 기억이지, 필시 과거가 아니라고. 그리하여 과거의 란페이는 어떠했는가. 현재의 란페이와 무엇이 다른가. 추구하던 삶의 향방은 과연 그대로인지. 계약이 끝날 이후에서나 그릴 의문점들은 보다 앞당겨진 시기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