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n Miyushi  ‧  반 미유시 ﹞

지금까지 5년간, 《반 후데 미유시》 는⋯⋯..

• 그라운드에 도착한 뒤, 클래스메이트들의 적응을 돕느라 바빴다. 흐릿한 기억이긴 하나 이미 그라운드에서 살아본 적 있다는 경험이 큰 도움이 된 듯하다. 치료를 마친 뒤에도 아와유키 마을에 계속 머무르며 얼굴을 자주 비췄다. 쿠폰으로 무언갈 물어보면 금방 답이 돌아오고, 꼬박꼬박 안부 인사를 보내는 등 변함없이 호의적이었다.

• 처음에는 청소년 쉼터에서 여러 지원을 받으며 지내다가 운 좋게 싼 월세로 방 하나를 얻어 지낼 수 있게 됐다. 그래 봤자 자그마한 원룸이었으나 혼자 사는 게 신기했는지 들뜬 모습을 보였다. 최소한의 돈을 마련할 수 있던 건 대필 덕이다. 미유시는 극도로 발달한 인터넷을 잘만 활용했다. 온라인은 정말 넓었고, 글을 쓰기 싫어하는 사람은 차고 넘쳐났다. 일이 끊기질 않았다.

• 그렇게 반년 뒤, 마을 밖에 나갈 일이 생겼다며 하루 정도 자리를 비웠다. 별일 없이 지나갈 거란 생각과 달리, 다음 날 마을에 돌아온 미유시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완전히 방 안에 처박혀버렸다.

• 그러니까, 말 그대로 집 밖에 나오지 않게 됐다. 필요한 생활용품이나 물, 식사 등등 모든 걸 배달로 해결했다. 집에 찾아와도 묵묵부답으로 아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나마 쿠폰은 가끔씩 확인하는지 중요한 연락에 대한 답장은 -낮은 확률로- 돌아왔다. 그마저도 ⌜아니⌟, ⌜상관없어.⌟ 처럼 성의 없는 단답에 불과했지만. 사실상 연락 두절이나 다 없는 상황. 미유시는 폐인처럼 살며 무려 2년간 틀어박혀 있었다.

• 그러던 어느 날. 2년간의 은둔 생활 끝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도쿄로 이사를 가버렸다. 그 뒤로 연락은 완전히 끊겼다.

• 아와유키 마을에 돌아온 건 고작 3일 전. 그러니 츠바키가 기억하는 미유시는 4년 반 전의 모습이 마지막일 거다.

01, 변화

당신은 까칠했지만 정이 많던 반 미유시를 기억하는가? 목표를 잃었음에도 최선을 다하던 반 미유시를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모조리 잊어도 좋다. 지금부터 서술할 반 후데 미유시는 완전한 타인이나 다름없으니까.

• 가장 큰 변화는 누가 뭐래도 성격이다. 이전의 침착하고 친절했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제 그는 조금 뻔뻔하며, 매사에 가볍고, 사소한 일에도 깔깔 웃는다. 성격이 바뀌자 자연스레 하는 행동, 습관, 말투 등 모든 게 달라졌다. 방정맞은 몸짓 하며 폐를 끼치고도 당연한 듯 굴기까지… 몸이 성장한 것과 달리 정신머리는 퇴보했다. 아니, 나날이 퇴보 중이다.

• 이제 당당히 언급할 수 있다. 미유시는 더이상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글과 관련된 모든 걸 싫어한다. 책, 독서, 작문, 대필…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제 대필은 그에게 있어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다. 하기 싫지만 생활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쓰는 것, 딱 그 정도의 감상. 일말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다. 그의 취미란에 ‘글’이 올라갈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다.

• 대신 좋아하는 것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도쿄를 떠돌며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댄 결과 가벼운 취미가 여럿 생겼다. 쿠로바코 재학 당시 ‘좋아하는 일을 찾아봐라.’, ‘하고 싶은 일이 뭐냐.’ 등등의 말을 들었던 게 도움이 됐던 걸까? 그래서 새로 생긴 취미가 무엇이냐 하면… 취객과 시비 붙기, 길바닥에서 잠들기, 허구한 날 싸움에 말려들기, 익명으로 키배 뜨기, 게임에서 욕설 채팅 쓰고 정지당하기. 화려한 라인업이다. 취미보단 헛짓거리에 가깝지만 본인은 내가 즐기는 일이니 취미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걸 듣고도 그들이 잘 된 일이라고 여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이걸로 알 수 있듯 미유시는 매우 즉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당장 하루 루틴마저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날엔 아침 일찍 일어나고, 어떤 날엔 밤을 새우고 잠들어 저녁에 눈 뜨고. 또 어떤 날은 온종일 자기도 하고… 제멋대로인 생활 패턴 탓에 눈 밑의 다크써클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불규칙한 생활의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하는 것뿐이다.

02, 그라운드

• 이제 와 숨겨 무엇하랴. 예상했듯, 혹은 알고 있었듯 반 후데 미유시는 그라운드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그라운드를 떠났기에 모든 걸 기억하진 못했으나, 남들보다 적응이 빠른 건 확실했다. 그라운드에 도착한 직후 고향에 돌아왔다는 감상에 잠긴 것도 잠시,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참, 이곳에선 나스이 미유시(那須井未祐志) 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아빠의 성을 그대로 따랐다.

• 그라운드의 지식이 있다 해도 잘 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병원에서 어떻게든 치료를 마친 뒤 하늘에서 내리는 눈만 멍하니 바라보던 미유시에게 말을 건 건 한 여성이었다. 자신을 청소년 쉼터의 직원이라 소개한 여성은 갈 곳은 있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즉, 미유시를 가출 청소년으로 착각한 거였다. 넓게 보자면 틀린 말도 아니었고, -일단 집을 떠나온 건 맞으니까.- 당장 몸 누일 곳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미유시는 쉼터와 방을 빌리며 신세를 졌다.

• 바쁘게 돌아다니나 싶더니 정작 쉼터에서는 책만 붙잡고 있는 미유시를 보고 직원이 글 쓰는 것도 좋아하냐 물었고, 인터넷에 글을 올려보는 건 어떠냐며 제안했다.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여러 사이트를 뒤지던 미유시는 그라운드에도 대필을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걸 알게 됐다. 돈도 필요했고, 언제까지 신세 지고 지낼 순 없는 노릇이니 간단한 의뢰 몇 개를 받았는데… 그게 일이 매우 잘 풀렸다. 덕분에 세 달 만에 돈을 마련해 자취를 시작했다. 물론 무보증 월세였다.

• 미유시의 생활력은 그냥저냥 괜찮았다. 기숙사에서 지낸 5년이 허송세월은 아니었던 모양. 한 가지 문제는 요리에는 영 재능이 없었단 건데… 반찬 가게와 근처 식당을 전전하며 어떻게든 해결했다. 그렇게 문제없이 잘 지내던 와중, 갑작스레 방에 틀어박혔다. 마을을 나갔던 게 원인 같긴 한데, 말해주긴커녕 얼굴조차 보이질 않으니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히키코모리로 지낸 2년 내내 모니터만 쳐다보며 살았는지 시력이 나빠졌다. 따로 안경을 맞추진 않아 멀리 있는 걸 볼 때면 눈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간단하게나마 하루를 기록해보려던 습관이 반년을 못 간 걸 보면 유의미한 시간을 보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대필 의욕도 이때쯤부터 떨어졌는지 입에 풀칠할 정도로만 겨우 벌어 생활비를 충당했다.

• 그런 상황에서 도쿄로 떠난 건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냥 큰 도시에 가고 싶은데 도쿄가 제일 유명하니까. 그게 전부다. 하늘에 맹세코 다른 이유는 없다. 신칸센을 예매하고, 캡슐 호텔을 전전하며 지내다 보니 얼마 없던 돈은 금방 바닥났다. 길바닥에서 행인들이나 구경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 밑바닥은 밑바닥을 알아보는 법이다. 마이(マイ, 남성, 20대 추정)는 부모를 잘 둔 덕에 돈만 많은 백수였다. 성도 없이 그저 ‘마이’. 아마 저 이름마저도 본명이 아닌 별명인 게 분명했다. 마이의 취미는 불쌍한 사람을 잡아다가 집도 내주고, 밥도 주고, 옷도 입혀주는 거였다. 마음씨가 고운 건 아니고 하루종일 같이 놀아줄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다. 부자의 생각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게 편하다.

• 어찌 됐건, 미유시는 망설임 없이 마이를 따라 갔고 신주쿠 한복판에 위치한 어느 고층 집에서 살게 됐다. 복층으로 이루어진 집엔 각자의 사정으로 길거리를 전전하던 사람이 서너 명 더 있었다. 미유시는 그들과 빠르게 친해졌고, 또 동화됐다. 이미 인생 계획도, 하고 싶은 일도 뭣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금의 미유시가 완성됐다.

03, 쿠로쿠모 언더그라운드

• 은둔 생활을 하기 전, 반년 간은 쿠로쿠모 언더그라운드를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츠바키와 대화하거나 쿠폰으로 문자를 나눌 때면 항상 가족들이 걱정된다, 무사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로 끝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치 않다. 쿠로쿠모 언더그라운드를 언급하는 일 자체가 줄었다. 상대가 화제를 꺼내는 게 아닌 이상 먼저 입을 열진 않는다.

• 미유시는 그라운드에 완벽히 적응했고, 마음에 들어 한다. 애초에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젠 정말 ‘지상의 인간’처럼 보인다. 당연하게도 가족의 생사는 알지 못하나, 마찬가지로 큰 관심은 없어 보인다. 아마 평생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그러려니 하고, 가야만 한다 해도 그러려니 할 거다. 미유시에게 세상만사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된 지 오래다.

• 아와유키 마을에 돌아온 건 고작 3일 전. 미루고 미루다가 방울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그동안 서랍 어딘가에 짱박아둔 쿠폰을 까먹지 않고 챙겨온 것만으로 기적인 수준. 쿠로쿠모 언더그라운드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직감한 것인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 더플백에 무언갈 한가득 챙겨왔는데… 전부 담배다. 앞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넉넉하게 종류별로 쓸어담았다고 한다.

• 방에 틀어박힌 시점을 생각하면 클래스메이트와는 약 4년 반만의 조우다. 미유시는 이전보다 더 반갑게 친구들을 맞이해주지만… 상대방 입장에선 글쎄.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돌아온 미유시가 반가울까? 그를 제대로 알아보기나 하면 다행이다. 미유시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즐겁다. 그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정신상태! 누가 뭐라 말을 얹고 손가락질하든 미유시는 신경 쓰지 않는다. 도리어 깔깔 웃어대며 농담 취급한다. 그야 나는 지극히 정상이니까!

• 한 가지 확실한 건, 돌아간다 해도 미유시가 후데의 가업을 이을 일은 죽어도 없단 거다.

04, 그 외

• 12월 26일생. 무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다! 생일을 신경 쓰지 않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제 생일을 마음에 들어 한다.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들뜬 거리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어 온 세상 사람들이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 같아 기쁘다나 뭐라나.

• 1인칭은 보쿠(僕). 타인은 보통 ‘너’, 혹은 ‘야’ 정도로 부른다. 감정 폭이 넓어진 만큼 표정 변화도, 말할 때 목소리의 높낮이도 다양해졌다. 활기차고 정신 사나운 사람이 됐다는 게 한눈에 보인다.

• 나스이, 또는 미유시로 불리길 원한다. 애칭이든 뭐든 상관없으나 반이나 후데로 불리는 건 영 달가워하지 않는다.

• 그라운드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그를 예상외로 글씨체가 바른 사람으로 평가한다. 쿠로쿠모 언더그라운드의 모든 이들은 후데에 걸맞은 정갈한 글씨체로 여겼는데 말이다.

• 니코틴 중독, 카페인 중독, 알코올 중독. 도쿄에 산 지 2년 반 만에 현대인의 3대 중독을 모두 꿰찼다. 그는 하루에 두 잔의 커피를 마셔야 머리가 맑아지며,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입이 심심하고, 한 캔의 맥주 없이는 잠들 수 없다. 항상 폴폴 풍겨대는 지독한 담배 냄새는 덤이다. 쓰레기 같은 삶을 살며 운동 한 번 하지 않았으니 체력은 현대인 이하로 뚝 떨어졌다. ‘한심한 인간’의 기준을 모두 모아 만들면 이런 사람이 탄생할 거다.

• 피어싱은 귀가 심심해 보인다는 말에 하나둘 뚫기 시작하니 지금의 행태가 됐다. 타투는 타투샵을 운영하는 지인이 -라고 해봤자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일 뿐이다.- 연습 상대가 필요하다길래 제 팔을 도화지마냥 내줬다. 처음엔 한쪽 팔이었던 게 양팔로 늘어나고, 목과 어깨까지 덮었다. 아와유키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등까지 꿰찼을지도 모른다.

• 한 달 전, 취객과 시비가 붙었는데 -물론 미유시도 좀 취해 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대가 맥주병을 머리에 내리쳐 이마가 찢어졌다. 그 탓에 3cm가량 꿰매고 상처 자국이 남았다. 지금껏 이처럼 (사소한?) 다툼에 자주 휘말렸지만 경찰에게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일이 커질 것 같으면 약삭빠르게 내뺐기 때문이다. 이런 쪽으로의 머리만큼은 비상하다.

• 5년간 사용하지 않았으나 아즈라는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정확히는 아즈라가 발전한 게 아니라 주변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뛸 수 있게 된 덕이다. 자신을 챙기지 않는 만큼 타인 역시 관심 외의 것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