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 Tsujikiri  ‧  로만 츠지키리﹞

지금까지 5년간, 《로만 카타나 츠지키리》 는⋯⋯..

• 그라운드에 올라온 직후, 두어 달이 채 지나기 전에 마을을 떠나 여행을 전전한 끝에 가마쿠라에 정착했다.

• 츠지키리는 그라운드에서 지내며 특별히 대단한 일을 찾아 다니진 않았다. 그저 그 나이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지냈다. 평화에 지극히 익숙했고, 평범하게 위에서의 삶에 익숙해졌다. 깊게 연관 된 사람은 없으나, 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 그리고, 그 평범을 유지하기 위해 관둔 게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주변인들과의 연락이다. 친우, 동료는 물론이고 막 올라왔을 적의 저를 아는 이들과는 모든 소통을 일방적으로 단절했다. 어쩔 수 없었다. 신분을 자각하면, 지금의 여유를 모조리 빼앗길 것 같았으니까.

• 그렇다고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다. 실력은 지시에 따라 연습하던 때보다 훨씬 상승했다. 이런 교육 방식이 걸맞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다.

• 그러나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잊진 않았다. 늘 몸에 지니고 있던 방울이나 무심코 땅을 보는 버릇 등이 그 반증일 테다.

• 츠지키리, 라는 검

간략하게 말하자면, 아주 살판 난 21세 한량 되시겠다. 더이상 그를 검으로 셀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전보다 더 물러졌으며, 또 동시에 전보다 더 날카로워졌다. 진검 아닌 목검을 쥔 뒤로 아이러니하게도 실력은 더 늘었으나 이제 저 자신은 검보다는 사람으로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한 추세다.

카타나를 잊은 것은 아니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관심이 없다. 마지막 달음박질을 뛸 때까지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어렴풋이 살아있겠거니 예상만 하고 있다. 츠지키리가 아는 카타나는 그리 쉽게 부러질 이들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그리워 하지도 않는다. 철은 차갑게 식었으며, 공정은 마무리되었다.

그라운드에서는, 그를 두드리거나 날을 갈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공정의 마지막을 뒷심 부족한 츠지키리 홀로 담당하게 되었으니 결론이야 뻔하다. 제멋대로의 검이 된 그는 하늘 아래에서 여유를 만끽하면서도 가끔씩 땅을 내려다보곤 했다. 꼭 부름 받을 때를 기다리는 것도 같았다……. 

• 츠지키리, 라는 인간

하여 그는 이제 ‘츠지키리’다. 곰살맞은 성격 덕에 주변에 쉽게 녹아들고, 또 그만큼 쉽게 사고를 친다. 카타나라는 목줄이 없어진 탓에 좀 더 자유분방해지기도 했다. 때문에 그가 예고 없이 훌쩍 아와유키 마을을 떠난 것은 그리 놀라운 이야기가 되지 못했다. 불분명한 가족의 생사나 남아있는 친구들의 상태에도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이는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 테다. 조금 더 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과거는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부러 떠올리지 않더라도 끈질기게 따라다닐 과거라, 구태여 나서서 챙길 이유가 없다 판단했다. 연락은 그렇게 끊어냈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아직까지는’ 인간이다. 아니, 외려 남은 말미를 놓치지 않고 즐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자신을 내려두고 인간이라는 자신에 집중한 츠지키리는 지하에 있을 때보다 좀 더 날카롭고, 동시에 어설픈 면이 있었으며, 또 제멋대로인 면이 있는 인간이 됐다. 시키는 것이라면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곧대로 움직였던 전과는 다르게 요즈음은 직무를 유기하는 것 또한 배웠다. 전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어쨌든, 분명 그는 지상에 올라오고 나서야 사람이 되었다. 우스운 일이다.

• 좋아하는 것은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종점까지 달리는 짧은 여행과 바닷가 구경. 수영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그라운드에서 의족이 고장나면 수습이 불가능하기에 오른 발만 몇 번 담그고 말았다. 하숙집 옥상으로 올라가면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는 게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었을까. 아, 자신을 꾸미는 것은 여전히 좋아한다. 

• 싫어하는 것은 ‘할 일’ 전반. 늘 그렇듯 해야만 하는 것으로 묶인다면 덮어두고 싫어한다. 요컨대 의무를 싫어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아르바이트는 쉬지 않고 쭉 했던 것으로 보아 도련님 출신인 것 치곤 돈의 중요성을 잘 아는듯.

• 츠지키리, 그라운드에선?

처음 그라운드에 올라온 해 겨울이 지나, 채 봄이 되기도 전에 가미카와 현을 떠났다. 이후 새로 둥지를 튼 곳은 가마쿠라 시의 작은 하숙집.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모두 보이는 풍경이, 돈을 좋아하는 주인집 부부 따위가 그에겐 썩 즐겁게 다가왔다. 츠지키리는 흐르는 섭리를 쉽게 받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히 그라운드에 적응했다. 마치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삶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가마쿠라에 도착한 직후, 월세를 내기 위해 처음엔 가라오케에서 카레를 끓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엔 에어 보드보다 훨씬 느린 자전거를 타고 피자를 배달했다. 가끔은 버스정류장에 앉아 하루종일 의미 없이 앉아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량, 날백수같은 삶이었으나 매일매일이 생기 있게 반짝였다. 그런 츠지키리가 끝내 정착한 곳은 아이들을 상대로 교육하는 작은 검도관이었다. 모든 일을 적당히 해내는 츠지키리였지만, 역시나 검을 쥐고 있을 때 가장 그다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꽤 성미에 맞았다. 보잘 것 없고 안락한 나날들로 5년을 꽉 채웠다. 이름보단 ‘사범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품에 지니고 다니던 방울이 더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츠지키리는 목검 대신 늘 관리해두었던 카타나를 들고 바로 오늘 아와유키 마을로 돌아왔다. 5년 전과 다를 것 없는, 평소와 같은 모습을 하고서.

• • • 에어보드보단 한참 느리지만, 자전거나 바이크 같은 이륜차 타는 것을 썩 좋아하게 됐다.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순간엔 꼭 내리치는 칼날과 동화된 기분이다. 이런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카타나’일지도.

    • 이와유키 마을을 떠난 이후, 정말로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약속의 증명은 방울을 지니고 다니는 것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