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n Miyushi  ‧  반 미유시 ﹞

붓을 놀리는 자들

가장자리에 멋들어진 붓글씨로 적혀있는 筆. 후데에서 적은 글이란 걸 증명하는 유일한 표식.

대필을 업으로 삼고 있으나 후데 파에겐 가게도, 마땅한 연락창구도 없다. 대필을 의뢰하고 싶다면 본가의 우편함에 직접 의뢰 편지를 넣거나 사전에 약속을 잡아 대면으로 설명해야만 한다. 의뢰를 수락할지, 완성에는 얼마나 걸릴지, 얼마를 필요로 하는지. 그런 것조차도 한참 동안 답장 편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의뢰를 받는 쪽, 부탁하는 쪽 가리지 않고 양쪽 다 불편한 방식이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이 방법을 고집하고 있다. 그야말로 ‘후데’라는 이름 하나면 충분하다는 오만함이 엿보이는 태도.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고지식하며 보수적인 집안인지 알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긴 역사가 말해주는 건 거짓은 아닌 모양. 쿠로쿠모 언더그라운드에서 가장 필력이 뛰어난 사람을 꼽으라 하면 열 명 중 세 명은 후데 파를 언급할 정도로 글솜씨가 유려하다. 인지도가 떨어진 지금도 이 정도의 인식이라면 전성기 땐 제법 힘이 있는 분파였다는 걸 추측할 수 있으리라. 어찌됐든, 번거로운 의뢰 절차를 보상해주듯 완성본만큼은 확실하다. 의뢰인이 원하는 것을 완벽히 파악해 적고, 앞으로도 이런 표현을 쓰면 좋을 거란 조언을 한다. 수정을 원한다면 곧바로 고쳐 보내주기까지.

즉, 전통을 중요시한다는 건 양날의 검 같은 거다. 불편함이 크지만 지금까지 쭉 이어져 내려온 만큼 정성이 담겨있고 완벽을 추구한다는 뜻이니까.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도 꾸준한 의뢰가 이어지는 건 이 덕이다. 대필인 걸 비밀로 하길 원한다는 요청도 받아들여 남몰래 들어오는 의뢰도 있는 편. 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해 일반인보단 4대 가문 측에서 요청하는 경우가 더 많다. 대가로는 주로 분파 간의 교류를 받아간다.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일종의 발버둥.

• • • • • 글을 쓰는 일인 만큼 지식이 풍부하고 아는 단어가 많은 게 가장 중요해 어렸을 때부터 학문 공부에 집중시킨다. 아야나시 배출이 끊긴 뒤로 유일한 특기나 다름없던 -남들은 돈벌이라고 불렀지만.- 대필에 매달리게 되며 그 강도가 심해졌다. 부모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작문을 보고 익히며, 성인이 되면 보조를 받으며 의뢰를 처리하다가 집안의 큰 어른이 죽으면 완전히 일을 물려받는다. 대필 자체는 나이에 상관없이 할 수 있고, 오히려 연륜이 쌓여 능숙한 글을 쓸 수 있으니 물려받는 게 늦는 편. 지금 받는 의뢰의 대부분은 조부모가 처리하고 있다.

        • 지금의 구성원은 조부모와 엄마, 본인, 여동생으로 딱 다섯뿐이다. 그마저도 조부모는 70세를 넘겨 언제 셋으로 줄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위태한 상황. 사실 후데 파의 보수적인 생각이 가장 도드라지는 건 가족 구성이다. 스즈히코히메의 핏줄이란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껴 자신들은 일반인과 다르다고 생각하기에 4대 가문 외의 결혼을 철저히 금지해왔다. 보수적인 걸 넘어 폐쇄적이기까지 한 집안. 분파를 처음 창파했을 땐 신고쿠 중심가에 살았으나 서서히 쇠퇴하며 외곽으로 옮겨갔다. 아예 니시타니로 갔다면 좀 더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신고쿠를 고집하는 걸 보면 타인의 시선을 매우 신경 쓴다는 걸 알 수 있다.

        • 그런 분파에 아이의 아빠 자체가 없다는 건 여러 가지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아빠가 있었으나 죽은 건 아니다. 얼굴을 아는 사람조차 없으며 그런 소식도 전혀 없었으니까. 사람들은 남은 가능성 내에서 숙덕거렸다. 많은 소문이 떠돌았다. 4대 가문이 아닌 자와 결혼해 숨기는 거다. 웃어른의 허락 없이 결혼해 구성원으로 들이지 않은 거다. 아니면, 혹시… … 가십거리를 씹던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컴컴한 천장이 아닌 그 위를. 지상(그라운드)을 말이다.

츠바키 기수.

미유시가 아야나시로서의 자신을 상상하게 된 건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이전까지의 미유시의 삶은 매우 단조로웠다. 집에서 얌전히 지내며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여동생과 글을 배우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런 삶이 갑자기 뒤바뀐 건 츠바키 기수에 관한 얘기가 나온 뒤부터다. 그의 조부모는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힘을 잃은 지금의 상태로는 의견조차 제대로 내기 어려워 반 가문의 치열한 경쟁에서 자리를 얻어낼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츠바키 기수는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나 다름없었다. 원래는 차지할 수 없는 자리를 얻어 아야나시를 배출하고, 영광을 되찾을 유일한 기회!

그 뒤로 미유시가 받는 가르침은 글을 쓰는 법에서 쿠로바코, 요괴, 계약 따위로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무슨 요괴와 계약하면 무슨 아즈라를 얻을 수 있고, 교육 과정은 어떠하고, 앞으로 이러한 훈련을 받게 될 거다 등등. 얼떨떨한 일임에도 그는 불만 한 번 보이지 않고 조부모의 의견을 따랐다. 그게 3년 전의 일이다.

• 그럼에도 꾸준히 글을 배운 건 순전히 본인이 원했기 때문이다. 사실 3년이란 기간은 미래의 새싹이 될 준비를 하기에 충분하진 않다. 꾸준히 아야나시를 배출한 분파처럼 체계적인 훈련이 있지도 않고, 전술이랄 것도 없으니 말이다. 온종일 매진해도 부족할 판이었지만 드물게도 고집을 부려 대필 업을 완전히 놓지는 않게 되었다. 미유시는 여동생과 함께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을 가장 즐거워했다. 어른들과 같은 일을 하며 소속감을 느끼고도 싶었고, 유독 여동생만 아끼는 조부모에게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 사실 미유시는 여동생보다 훨씬 뛰어났다. 머리든 이해력이든 기억력이든, 모든 방면에서 말이다. 조부모는 그게 불만이었는지 미유시의 영리함이 드러나게 되며 더욱 쌀쌀 맞아졌다. ‘후데’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건 여동생뿐인데 쿠로바코, 심지어 장기 말로 쓰이고 버려질 츠바키 기수로 들어갈 미유시가 뛰어나 봤자 무슨 쓸모가 있냐며 말이다. 심지어 미유시는 몸 쓰는 데엔 재능이 없었다. 힘도 크게 늘지 않아 요괴와의 계약에만 완전히 의지해야 할 판이 되자 무관심은 심해져만 갔다. 대놓고 핍박을 주진 않았으나 일부러 여동생을 더 오냐오냐해주고 선물을 사주는 등 은근한 차별이 이어졌다. 이런 차별을 견딜 수 있던 건 동등하게 아껴주던 어머니 덕이다. 엄마의 자상한 말 한마디면 힘든 날도 몇 번이고 이겨낼 수 있었다.

• 그닥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미유시는 낙담하지 않았고, 무사히 입학이 확정되었다. 사실 입학 서류가 통과된 과정은 ‘무사히’로 요약해도 될 만큼 간단하진 않았다. 이전에 아야나시를 배출한 적이 있다는 점, 의뢰의 대가로 받아냈던 꾸준한 교류, 가문을 향한 맹목적인 신뢰, 미유시의 재능… 그 모든 것이 운 좋게 맞아떨어져 얻어낸 결과였다. 미유시는 츠바키 기수가 무엇이라 불리는지 모를 만큼 멍청하진 못했다. 매우 높은 확률로 죽게 될 거란 걸 입학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이는 그저 덤덤했다. 아야나시가 되는 게 분파를 위한 유일한 길이자 좋은 기회라는 말을 질리도록 들은 탓인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부심조차 들 정도였다. 인정받고자 하는 강한 마음으로 두려움조차 이겨냈다.

글과 맞닿아 있는 것.

미유시의 취미이자 특기는 뻔하게도 글을 읽고 쓰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밝혔을 때 종종 이런 질문들을 받기도 한다.「 네가 후데 파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글에 관심을 가졌을까? 네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맞긴 해?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으니 착각 한 거 아냐? 」...자칫 무례할 수 있는 말을 들어도 미유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관심을 둔 거라 해도 글을 좋아하는 마음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만큼 무언갈 읽고 쓰는 건 미묘하게 집안에서 겉돌던 미유시에게 위로가 되는 행위였다. 글에 집중할 때면 잡생각을 모조리 지워버릴 수 있어 좋았다. 그렇기에 동아리도 망설임 없이 문학부에 들어갔다. 다른 동아리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 외.

보수적인 집안이었던 만큼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었다. 외출을 하려면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뭐는 위험하다, 뭐는 점잖지 못하다, 뭐는 서민들이나 하는 거다… 항상 그런 말이 따라붙어 행동 하나하나를 제한받고 교정 당했다.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긴 했으나 사실 마음속으론 불만이 많았다. 혼자서 상점가를 구경해보고도 싶었고, 또래 친구도 많이 만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왔는데… 쿠로바코에 오게 되며 저 모든 걸 실현할 수 있게 되자 미유시의 마음은 말 그대로 ‘만세! 자유다!’ 상태이다. 기숙사에서 살며 집에서 겪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여러모로 기대되는 모양. 입학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은 건 이 영향도 있을 거다. 가장 해보고 싶은 건 에어보드 타기였다고 비밀 얘기처럼 말하곤 한다.

• • • • 12월 26일생.

      • 1인칭은 보쿠(僕). 원래 연장자에겐 존댓말을 쓰나 같은 츠바키 기수는 모두 친구라고 생각하는지 반말을 사용한다.

      •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 특유의 목소리와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투 덕에 듣기 편안한 느낌을 준다.

      • 입학하기 전, 네가 자랑스러운 후데 파의 일원이란 걸 기억하고 무시 받지 않도록 행동하라고 교육받았다.

      • 또래와 많이 어울려 놀지 못해 소통에 서툰 것도 있지만 저 조언 탓에 더욱 잘난 체하는데 급급한 걸지도 모른다.

      • 원래 왼손잡이였으나 조부모의 등쌀에 못 이겨 오른손잡이로 교정받았다. 지금도 왼손으로 간단한 글 정도는 적을 수 있다.

      • 여동생의 이름은 히카리(光). 밝고 찬란하게 살아가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입학 선물로 엄마와 동생이 함께 자수를 놓아준 손수건을 받았다. 내용은 ‘미유시의 앞날에 안녕과 행복이 가득하길.’

      • 호불호가 많진 않으나 기본적으로 실내 활동을 선호한다. 몸 쓰는 것에 재능이 없으니 자연스레 야외 활동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 외엔 단 것. 평소에 많이 먹어보지 못해 간식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